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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적

앙코르 제1대 보존소장 장 꼬마유의 생애와 바이욘 묘비에 깃든 영원한 애수

앙코르의 침묵을 깨운 영혼의 순례자: 제1대 보존소장 장 꼬마유의 생애와 바이욘 묘비에 깃든 영원한 애수

밀림의 장막 너머, 잊힌 돌들의 수호자를 위한 애가

캄보디아 시엠립의 울창한 열대 우림, 옛 크메르 제국의 심장부인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바이욘(Bayon) 사원을 에워싼 순환 도로의 남서쪽 모퉁이를 조용히 거닐다 보면, 거대한 사암 건축물들의 압도적인 위용에 가려져 자칫 지나치기 쉬운 작고 은밀한 안식처가 나타난다. 마치 고대 크메르의 부조 속에 등장하는 나팔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대나무 숲이 좁은 오솔길을 이루며 호위하듯 도열해 있는 그 길의 끝에는, 무성한 덩굴식물과 이끼, 그리고 열대의 습기가 부드럽게 감싸 안은 장방형의 무덤(caveau)과 뾰족하게 솟아오른 작은 피라미디온(pyramidion)이 세워져 있다.

마치 시간을 잃어버린 미니어처 신전처럼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이 묘비에는, 앙코르의 찬란한 영광과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운명을 동시에 증언하는 프랑스어 비문이 다음과 같이 묵묵히 새겨져 있다.

“장 꼬마유를 추모하며. 제1대 앙코르 보존소장. 1916년 4월 30일, 48세의 나이로 자신의 임지에서 쓰러지다(A la mémoire de Jean Commaille. Premier conservateur d’Angkor. Tombé a son poste le 30 avril 1916 à l’age de 48 ans).”

이 고요하고도 애달픈 무덤의 주인공인 장 나르시스 꼬마유(Jean Narcisse Commaille)는 앙코르 유적의 발굴과 보존이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가장 첫 장을 고통과 헌신으로 써 내려간 선구자이자, 자신이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폐허의 돌무더기 사이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위대한 제국의 잊힌 영광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생애와 예술적 열정을 불태웠던 그가, 왜 고국 프랑스의 따뜻한 묘역이 아닌 이국땅의 깊은 밀림, 그것도 수십 개의 거대한 얼굴들이 자비로우면서도 기괴한 미소(enormous smiles)를 짓고 있는 바이욘 사원의 그늘 아래에 영면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역사적 추적이다.

이는 곧 20세기 초 프랑스 극동연구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EFEO)이 주도했던 식민지 고고학의 낭만적이면서도 가혹했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동시에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돌의 영원성 사이에서 번민했던 한 예술가의 내면을 해부하는 과정과도 같다. 그의 삶은 군사적 규율과 예술적 감수성이 처절하게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캄보디아 현지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식민지 변방의 잔혹한 폭력이 교차하는 부조리하고도 비통한 비극이었다.

화가의 영혼을 품은 이방인의 군복: 꼬마유의 기원과 인도차이나의 부름

장 꼬마유의 삶은 태생부터 규율과 일탈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축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1868년 6월 24일,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과 거친 바닷바람이 교차하는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마르세유(Marseille)에서 태어났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엄격한 가풍을 이어받은 그는 자연스럽게 라 플레슈(La Flèche)에 위치한 명망 높은 국립 군사학교(Prytanée national militaire)에 진학하며 엘리트 군인으로서의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차가운 총검이나 엄격한 군사적 지휘 체계로는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하고도 자유로운 예술적 충동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청년 꼬마유는 결국 당시 프랑스 군 엘리트 코스의 정점이었던 생시르(Saint-Cyr)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단호히 거부하는 결단을 내린다. 훗날 그의 생애를 조명한 기록들이 전하듯, 그는 “예술의 부름에 너무나 강렬하게 이끌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기에”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데생과 회화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타고난 예술가로서의 이 거칠고도 낭만적인 삶의 선택은, 당시 그가 직면해야 했던 경제적 빈곤이라는 척박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그림에 전념하고자 했던 그의 순수한 꿈은 아무런 재정적 후원이 없는 상태에서 곧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제복을 다시 입어야만 했다. 1896년 1월, 그는 어떤 수단도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프랑스 외인부대(Légion étrangère)에 자원입대하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의 삶을 유럽의 비좁은 골목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광활한 대륙, 그리고 캄보디아라는 미지의 신화적 공간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외인부대 소속으로 캄보디아 민병대의 수석 경비대원(Garde principal)으로 발령받은 그는, 열대의 무더위와 밀림이 뿜어내는 이국의 낯선 풍경, 그리고 크메르인들의 독특한 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갔다.

1898년 군 복무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캄보디아 보호령의 민사국(Services civils du Protectorat)에 회계 보조원으로 취직하여 인도차이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9년, 꼬마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처음으로 앙코르(Angkor) 유적의 경내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당시 앙코르는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거대한 반얀트리와 무화과나무의 뿌리에 칭칭 감겨 밀림에 집어삼켜진 거대한 신화적 공간이자 잊힌 제국의 무덤이었다. 군인의 제복을 벗고 본연의 예술가적 시선으로 폐허를 마주한 그는, 버려진 크메르 사원들의 웅장함과 그 이면에 흐르는 짙은 비애감에 깊이 압도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 묵묵히 붕괴를 기다리고 있던 사암 블록들은 화가였던 그의 영혼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이 시기부터 앙코르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탐명하며 스케치하고 수채화로 남기기 시작했다. 1899년 5월에 그려진 « Angkor Wat, Mai 99 » 와 같은 섬세하고도 우수 어린 작품들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폐허와 교감하는 한 인간의 고백이었으며, 훗날 EFEO의 소중한 아카이브로 남게 되어 그의 예술적 재능을 오늘날까지 증언하고 있다.

극동연구원(EFEO)의 태동과 유적의 부름을 향한 투신

1900년, 장 꼬마유는 프랑스 식민 행정부가 인도차이나의 역사와 문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창설한 프랑스 극동연구원(EFEO)에 서기 겸 회계 담당자(secrétaire-trésorier)로 합류하며 본격적인 고고학적, 역사적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비록 시작은 학자가 아닌 행정관의 신분이었으나, 이는 그의 삶이 앙코르와 영구적으로 결속되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EFEO에 입사한 직후, 그는 사이공(Saigon)에 최초의 박물관을 설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이 경험은 그가 고대 유물과 박물관학에 대한 실무적인 감각을 익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EFEO의 본부와 보호령의 행정 서비스가 하노이(Hanoi)로 중앙집권화되면서, 그는 박물관의 전체 컬렉션을 하노이로 안전하게 이전하는 막중한 책임도 함께 주도했다. 동시에 그는 프놈펜 남동쪽에 위치한 바삭(Bassac) 유적의 초기 발굴을 조직하는 일에도 관여하며 현장 고고학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동료 학자 앙리 파르망티에(Henri Parmentier)가 훗날 회고했듯, EFEO 합류 이전과 초기의 꼬마유의 삶은 매우 “격동적(turbulent)”이었으며, 그의 기질적인 불안정성은 종종 재정적인 문제로 분출되었다. 타고난 허세나 낭만적인 성향, 이른바 “과시적인 경향(ostentatious tendencies)”으로 인해 그는 심각한 재정적 압박(cruel financial strain)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잠시 EFEO를 떠나 슈나이더(Schneider) 인쇄소의 관리자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인쇄소의 잉크 냄새와 세속적인 돈벌이는 밀림에 묻힌 돌들을 갈망하는 그의 영혼을 채워주지 못했고, 그는 이내 본래의 행정 조직인 민사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의 운명이 앙코르의 붉은 흙과 완전히 결합하게 된 결정적인 지정학적 사건은 1907년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캄보디아의 서부 영토(시엠립, 바탐방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시암(Siam, 현재의 태국) 왕국이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캄보디아 보호령에 반환(retrocession)한 것이다. 이로써 앙코르의 거대한 유적군은 공식적으로 EFEO의 책임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구분 연도 꼬마유의 주요 궤적 및 시대적 배경
태동기 1868

6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군인의 아들로 출생. 이후 라 플레슈 군사학교에서 수학.

군 복무 및 아시아 진출 1896

예술가의 꿈을 접고 외인부대 입대, 캄보디아 민병대 수석 경비대원으로 부임하며 이국적 삶 시작.

운명적 조우 1899

군 복무를 마치고 캄보디아 민사국 회계 보조원으로 근무하던 중 앙코르 첫 방문 및 스케치 작업 돌입.

EFEO 합류 및 행정 경험 1900

프랑스 극동연구원(EFEO)에 입사하여 사이공 최초의 박물관 설립 및 하노이로의 유물 이전 주도.

제1대 보존소장 임명 1908

7월 14일, 앙코르 유적군 제1대 보존소장(Conservateur)으로 공식 임명. 본격적인 보존 작업 착수.

예술적, 문학적 결실 1908-1912

『신들의 황혼(Le crépuscule des dieux)』(1908), 『앙코르 유적 안내서(Guide aux ruines ď Angkor)』(1912) 출간.

비극적 결말 1916

4월 29일(비문 기록 30일), 인부들의 임금을 수송하던 중 밀림의 오솔길에서 무장 강도에게 피살.

EFEO의 수뇌부였던 에티엔 루네 드 라종키에르(Etienne Lunet de Lajonquière), 루이 피노(Louis Finot), 앙리 파르망티에는 앙코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특별 보존 부서의 창설이 시급함을 천명했다. 이 막중한 책임을 떠맡을 적임자로 지목된 이가 바로 장 꼬마유였다. 1907년 12월 4일 제정된 법령에 따라 바탐방 총독의 관할 하에 앙코르 파견 민사국 서기로 임명된 그는, 즉시 초기 제초 및 벌채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8년 7월 14일, 꼬마유는 마침내 그가 꿈에 그리던 ‘제1대 앙코르 보존소장(Premier Conservateur du site)’이라는 공식 직함을 부여받게 된다. 이는 그에게 있어 단순한 행정적 직위의 상승을 넘어, 예술적 감수성과 제국주의적 행정력이 결합된, 그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완벽하고 이상적인 삶’의 실현이었다.

죽음의 고독(Dead Solitudes) 속에서 꽃핀 금욕적 삶과 앙리에트의 슬픔

보존소장이라는 영광스러운 직함이 주어졌지만, 앙코르에서의 실제 삶은 낭만적인 환상과는 철저히 괴리된 가혹한 생존 투쟁이었다. 현장과 최대한 밀착하기를 원했던 꼬마유는 앙코르 와트의 서쪽 참배로 입구 근처에 급조된 소박하고 초라한 목조 가건물(방갈로)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앙코르는 오늘날의 관광지와는 달리, 열대의 치명적인 질병이 창궐하고 숨이 막힐 듯한 무더위가 일 년 내내 지속되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거대한 모기 떼가 시커먼 소용돌이(swirls of mosquitoes)를 일으키며 인간의 피를 노렸고, 질식할 듯한 화전의 연기(asphyxiating fires)가 폐허를 감싸는 ‘죽음의 고독(dead solitudes)’ 그 자체였다.

이러한 지옥 같은 환경은 그의 가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안겨주었다. 꼬마유는 1904년 9월 24일 하노이에서 자신보다 14세나 어린 22세의 앙리에트 쥘리 루스탈레(Henriette Julie Loustalet)와 결혼식을 올린 바 있었다. 파리의 문명에 익숙했을 이 젊은 아내에게 밀림 한가운데서의 야만적인 은둔 생활은 끔찍한 형벌과도 같았다.

이 부부의 처절한 생활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썩어 들어가는 낡고 부실한 목조 바닥(vetust hardwood floor)이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그녀가 고향에서 가져온 소중한 피아노가 바닥 아래로 처참하게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서구의 우아한 문명이 열대의 파괴적인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여주는 식민지 개척사의 서글픈 은유였다. 피아노의 추락과 함께 열대의 병마에 시달리며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아내 앙리에트는 결국 밀림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남겨둔 채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아내마저 곁을 떠난 후, 꼬마유는 시엠립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겨 남은 생의 대부분을 완벽하게 홀로 보냈다. 1년 중 4분의 3 이상을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은 채 폐허의 돌들과 대화하며 지냈다. 동료 파르망티에가 관찰했듯, 한때 격동적이고 과시적이었던 그의 기질은 혹독한 자연의 시련과 절대적인 고립 속에서 깎여나가며, 앙코르의 승려들조차 범접하기 힘든 “거의 금욕적(ascetic) 수행에 가까운 겸손하고도 극기적인 삶”으로 변모해 갔다.

놀라운 것은, 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피로와 고통스러운 고립(severe fatigue and painful isolation) 속에서도 꼬마유는 결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붕괴되어 가는 돌들을 위로하고 쓰다듬는 이 삶을 가리켜 “자신이 평생토록 꿈꿔왔던 삶의 이상(the very ideal of life he dreamed of)”이라고 고백했다. 그것은 세속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폐허를 향한 절대적인 종교적 귀의와도 같았다.

밀림과의 사투, 그리고 ‘꼬마유의 돌무더기(Tas Commaille)’가 남긴 위대한 유산

제1대 보존소장으로서 장 꼬마유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학술적인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의 세월 동안 앙코르를 짓눌러 온 거대한 열대 우림의 두꺼운 덩굴과 뿌리, 그리고 무겁게 퇴적된 흙더미로부터 질식해 가는 돌들을 해방시키는 물리적이고도 처절한 사투였다.

그의 작업 방식은 철저하게 프랑스 식민 행정의 정밀함과 군인 출신 특유의 엄격한 규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는 앙코르 유적의 재건을 단순한 고고학적 발굴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문명의 빛을 다시 비추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의 일환으로 여겼다. 이를 위해 1908년 1월부터 하노이의 EFEO 본부에 매월 꼼꼼하고 상세한 월간 활동 보고서를 발송하기 시작했으며, 1909년부터는 매일매일의 작업 내용과 발견 사항을 세밀하게 기록한 ‘발굴 일지(Journaux de fouilles)’를 작성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조직의 상부와 현장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앙코르 보존 역사를 증명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귀중한 1차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꼬마유가 마주한 현실은 참담할 정도로 열악했다. 1909년 2월 1일, 그는 극동연구원의 거두 루이 피노(Louis Finot)에게 보낸 절망적인 서신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는 1908년보다 조금도 부유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메트르(Maitre)가 전하기를, 앙코르에 할당된 예산이 고작 6000프랑뿐이라고 합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Quelle misère!)”.

이토록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빈약한 장비 속에서도 그는 기적적인 작업 속도를 뽐냈다. 루네 드 라종키에르와 함께 우선순위를 정립한 그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앙코르 와트(Angkor Wat)의 거대한 안뜰과 중앙 성소, 그리고 진입로를 뒤덮은 거친 초목을 걷어내는 데 자신의 모든 기력을 쏟아부었다.

이후 1911년부터 1914년까지 그의 열정은 그가 가장 심오하게 사랑했던 건축물이자 앙코르 톰의 중심인 바이욘(Bayon) 사원 정비에 집중되었다. 거대한 사면불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무너져 내린 사암 더미를 파헤치는 일은 붕괴의 위험을 수반하는 극도로 위험하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앙코르 톰의 남북 도로망 복원(1910-1912년),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이 왕자 테라스 등 왕궁 테라스 주변의 개간(1911년), 쁘레아 삐뚜(Preah Pithu) 유적군 정리(1912년), 그리고 바푸온(Baphuon) 사원에 방치되어 있던 거대한 와불상(Reclining Buddha)의 형태를 드러내고 부조를 촬영하는 작업(1908-1915년) 등 앙코르 중심부의 거의 모든 핵심 유적지를 자신의 손으로 어루만지며 수백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유적지 명칭 집중 작업 연도 주요 수행 작업 내용 및 성과
앙코르 와트 (Angkor Wat) 1908 – 1910

서쪽 참배로 및 주요 안뜰의 빽빽한 제초, 초목 뿌리 제거, 진입로 및 갤러리 복원 시작.

바이욘 (Bayon) 1911 – 1914

앙코르 톰 중심부 개간, 무너진 수만 개의 사암 블록 분류 및 산적. 고고학적 토대인 ‘꼬마유의 돌무더기’ 생성.

왕궁 테라스 (Terrasses royales) 1911

코끼리 테라스 주변 및 광장 일대 덤불 제거, 매몰된 구조물 및 조각상 확인.

쁘레아 삐뚜 (Preah Pithu) 1912

유적지 주변을 질식시키던 식물 군락 개간 및 초기 사원 형태 파악.

바푸온 (Baphuon) 1908 – 1915

제2층 서쪽 벽면의 와불상(Reclining Buddha) 형태 발굴, 부조 사진 촬영 및 최초의 지질학적 시험 탐구(sondages) 실시.

특히 바이욘 사원에서의 작업 과정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훗날 앙코르 고고학의 전설이 되었다. 정식 고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철저한 독학자(self-taught)이자 경험주의자(empirical)였던 그는, 무성한 밀림을 베어내고 건물 형태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사방에 흩어지고 붕괴된 수만 개의 사암 블록들을 발견했다. 그는 이 블록들을 무의미하게 폐기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수습하여 사원 주변 곳곳에 산더미처럼 정성스럽게 쌓아 올렸다.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완성된 이 돌무더기들은 이른바 ‘꼬마유의 돌무더기(Tas Commaille)’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현장을 정리하기 위한 아마추어적인 고육지책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이 돌무더기들은 단순한 잔해가 아니라 붕괴된 제국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대한 아카이브였다. 훗날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고고학자 올리비에 퀴냉(Olivier Cunin)과 같은 후대 학자들은 이 ‘꼬마유의 돌무더기’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바이욘 사원에 현재 남아있는 탑들 외에도 원래 최소 11개의 ‘사면불 탑(Face Towers)’이 더 존재했었다는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낼 수 있었다. 이론적 배경이 없는 현장 실무자의 집념 어린 육체노동이 한 세기 뒤의 위대한 학술적 성과를 이끌어낸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신들의 황혼(Le crépuscule des dieux) 속에서 붓을 든 은둔자

장 꼬마유의 진정한 위대함은 단순히 밀림을 개간하고 행정 문서를 작성하는 강직한 관료적 태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라 플레슈 시절부터 갈망해 온 화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앙코르는 그의 억눌렸던 예술적 영감을 무한히 자극하는 거대한 캔버스였다. 그는 혹독한 육체노동이 끝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일요 화가(peintre du dimanche)’가 되어 수채화 붓과 팔레트를 들고 무너진 신전들의 찬란한 애수를 화폭에 담았다.

그의 수채화 작품들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복구해야 할 공사 현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할 것 같았던 신들의 거처가 속절없이 허물어져 가는 장엄한 쇠락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찬미하는 것이었다. 바이욘의 사면불 탑들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작품(The Face Towers, watercolor by Jean Commaille)에서 보이듯, 그는 철저히 낭만주의자의 시선으로 폐허와 교감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태도는 1908년 《인도차이나 평론(La Revue indochinoise)》에 기고한 에세이 『신들의 황혼(Le crépuscule des dieux)』에서 절정에 달한다. 바그너의 장엄한 오페라 제목을 차용한 이 글의 제목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꼬마유는 바그너의 서사시에서 게르만 신들의 성벽인 발할라가 불타오르며 신들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듯, 앙코르의 장대한 사암 신전들이 열대 우림의 맹렬한 자연적 파괴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며 크메르 신들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음을 깊이 체감하고 있었다. 황혼 녘, 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로 폐허 위로 드리우는 길고도 짙은 그림자 속에서, 그는 스러져간 제국을 향한 지독한 우수와 연민을 문장으로 토해냈다.

그의 학술적이고도 대중적인 기여 역시 눈부셨다. 1910년에는 앙리 뒤푸르(Henri Dufour), 샤를 카르포(Charles Carpeaux) 등 당대 최고의 탐험가 및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앙코르 톰의 바이욘(Le Bayon d’Angkor Thom)』이라는 기념비적인 저서를 공저함으로써 바이욘 사원의 신비로운 부조들을 서구 학계에 상세히 보고했다. 나아가 1912년에는 관광 잠재력이 커져가는 앙코르를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앙코르 유적 전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안내서인 『앙코르 유적 안내서(Guide aux ruines ď Angkor)』를 파리의 하셰트(Hachette) 출판사에서 집필 및 출간했다. 이 책은 수백 장의 사진과 도면을 포함하여 외부 세계에 앙코르의 웅장함을 널리 알리고, 방문객들이 폐허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최고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의 업적은 캄보디아 왕실로부터도 깊은 인정을 받았다. 1907년 조약으로 시엠립이 반환된 이후, 1909년 9월 캄보디아의 국왕 시소왓(King Sisowath)이 역사상 처음으로 시엠립과 앙코르 유적을 시찰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국왕을 직접 영접하고 안내하는 영광스러운 역할 역시 제1대 보존소장인 꼬마유에게 주어졌다.

오솔길에 흩뿌려진 선혈: 가장 잔혹하고 부조리한 1916년 4월의 비극

1916년의 봄이 찾아왔을 때, 앙코르에서의 금욕적이고 초인적인 삶은 꼬마유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수년간 지속된 극한의 고립, 풍토병, 열대의 무더위, 그리고 매일같이 무거운 돌덩이들과 씨름해야 하는 육체적 노동은 48세가 된 그의 기력을 소진시켰다. 한때 폐허 속의 삶을 ‘이상’이라 칭송했던 그조차도 한계에 다다랐다. 사망하기 불과 몇 주 전, 그는 극동연구원 수뇌부에 강력하게 은퇴를 열망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은퇴 과정조차 순탄치 않았다. 책임감이 남달랐던 그는 적절한 행정적 절차를 무시한 채 펠릭스 카르디(Felix Cardi)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명하려 시도했고, 이로 인해 오랜 상관이자 EFEO의 핵심 인물이었던 루이 피노의 격렬한 분노(wrath)를 사며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앙코르의 복원뿐이어서, 은퇴를 논의하는 와중에도 건축가 오귀스트 들라발(Auguste Delaval)과 앙코르 와트 탑들의 복원 스케치 방향을 두고 열띤 서신을 주고받으며 마지막 예술적 혼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한 말년을 보낼 기회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916년 4월 29일(그의 묘비에는 4월 30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앙코르의 보존소장으로서 가장 일상적이고 의무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유적지 현장에서 무거운 돌을 나르고 밀림을 베어내는 고된 육체노동을 전담하던 캄보디아 현지인 인부들, 즉 ‘쿨리(coulis)’들에게 나누어 줄 한 주간의 임금을 챙긴 그는 시엠립에서 앙코르 톰으로 향하는 흙먼지 날리는 한적한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그가 운반하던 현금 뭉치의 냄새를 맡고 길목에 매복해 있던 무장 강도단이 그를 무참히 습격했다. 수백 년 동안 밀림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앙코르의 신들을 햇빛 아래로 구출해 낸 위대한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매일같이 수백 번도 넘게 거닐며 땀방울을 흘렸던 그 친숙한 흙길 위에서 차가운 칼날에 찔려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동행했던 그의 하인은 두려움에 질려 주인을 버려둔 채 혼비백산하여 현장을 도망쳤다.

이 끔찍한 사건은 단순히 한 식민지 행정관의 죽음으로 치부될 수 없는, 앙코르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당시 인도차이나의 많은 서구 식민지 관료들이 원주민 노동자를 야만인 취급하며 억압하거나 착취했던 것과 달리, 꼬마유는 캄보디아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유창한 크메르어(Khmer)를 구사하여 통역 없이 현지인들과 직접 교감했다. 인부들을 지휘할 때 결코 폭력적인 방식이나 억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지휘관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덕목인 ‘공정함(justice)’과 ‘원칙’을 바탕으로 현장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앙코르의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거대한 돌을 맨몸으로 옮겨야 하는 인부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되고 지루한 노동의 순간마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쾌활한 ‘유머 감각(humorous verve)’을 발휘하여 지친 캄보디아인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사기를 북돋웠다. 현지인 노동자들은 이런 꼬마유를 이방인의 지배자가 아닌, 자신들의 진정한 지도자이자 아버지처럼 깊이 따르고 존경했다.

그렇기에 그의 피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느낀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손을 놓고 통곡하며 ‘진정한 애도(true mourning)’에 빠져들었다. 범인들이 같은 현지인 강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암살자들과 내통했거나 정보를 흘렸다는 항간의 모욕적인 의심을 분노와 함께 강력히 배격하며, 꼬마유에 대한 자신들의 순수한 충성심과 결백을 눈물로 호소했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이 야만적인 사건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사 끝에 꼬마유를 습격한 세 명의 주범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프놈펜(Phnom Penh)의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지체 없이 처형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주인을 지키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하인 역시 범죄 현장 이탈 및 방조의 죄를 물어 18개월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무자비하고 부조리한 죽음은 낭만적인 고고학 발굴 이면에 도사린 식민지 변방의 폭력적이고도 야만적인 현실을 여과 없이 폭로하는 핏빛 흉터였으며, 이방인과 원주민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가장 순수한 유대를 맺었던 한 고결한 영혼에 가해진 가장 부당하고 원통한 보상이었다.

영원한 미소 아래에서 무한을 호흡하다: 바이욘 남서쪽 묘비의 상징적, 건축적 귀향

장 꼬마유의 비참한 죽음 이후, 그의 장례와 유해 안치 장소를 결정하는 일은 남은 이들에게 가장 숙연하고도 중대한 의무였다. 그의 유해는 쾌적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나 고국 프랑스의 안락한 묘역, 심지어 그가 일상적으로 머물던 앙코르 와트나 시엠립 시내가 아닌, 앙코르 톰의 정중앙에 솟아오른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신전, 바이욘(Bayon) 사원의 남서쪽 깊은 숲속에 안치되었다. 무덤의 위치 선정은 결코 임시방편이나 편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망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철저하게 상징적이고 영적인 공간의 배치였다.

생전의 꼬마유에게 바이욘은 앙코르의 그 수많은 거대한 건축물들 중에서도 가장 각별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닌 대상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미로와도 같은 기괴한 사원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아름다움(mysterious beauty)”이 “폐허에 다가가는 모든 이의 영혼을 강박적으로 사로잡는다(haunts everyone)”고 토로할 정도로 바이욘의 영적인 마력에 깊이 탐닉해 있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이어진 바이욘의 제초 및 개간 작업은, 붕괴 직전의 불안정한 돌무더기들을 지탱하면서 돌 틈새로 파고든 식물의 거대한 뿌리만을 섬세하게 도려내야 하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고난도의 임무였다. 그는 이 끔찍할 정도로 위험하고 ‘거대한 과업’을 완수하는 것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열렬하고 간절한 열망(most ardent desire)으로 삼았고, 마침내 그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냈다. 따라서 바이욘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그의 육체적 땀과 예술적 사유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그의 진정한 분신이자 무대였다.

오늘날 그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그 자체로 시각적이고 영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방문객이 울창한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어느덧 덩굴 식물에 반쯤 묻혀 자연의 일부로 완전하게 회귀하고 있는 고요한 무덤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이 오솔길의 대나무들은 평범한 식물이 아니다. 민족-음악-고고학적(ethno-archaeo-musicological) 시선으로 관찰하면, 그 대나무의 독특한 형태는 고대 크메르의 부조 속에 자주 등장하는 제례용 나팔을 완벽하게 빼닮아 있다. 마치 자연이 스스로 악기가 되어 죽은 자를 위한 소리 없는 진혼곡을 수백 년째 연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덤 자체의 형태 또한 매우 상징적이다. 꼬마유의 묘소는 고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프랑스식 평면 묘비나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시신을 안치하는 작은 석실(caveau) 위에, 고대 이집트나 동양의 제단에서 영원성과 하늘을 향한 영적 상승을 상징하는 뾰족한 장식인 ‘피라미디온(pyramidion)’이 우뚝 솟아오른 독창적인 건축 형태를 취하고 있다. 피라미디온은 우주의 중심이자 신들의 거처인 수미산(메루산, Mount Meru)을 상징하며 하늘로 솟아오른 크메르 신전들의 층단형 피라미드 구조와 묘한 시각적, 철학적 조화를 이룬다. 이는 생전에 크메르의 신들과 깊이 교감했던 꼬마유의 영혼이 이국땅의 우주관 속으로 온전히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설계다. (다행히도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가던 이 상징적인 묘역은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극동연구원(EFEO)과 캄보디아 당국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정성스럽게 복원되었다.)

이 묘역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은유는, 무덤의 위치와 바이욘 사원 탑들이 맺고 있는 수직적인 시선 교환에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피에르 로티(Pierre Loti)가 1913년에 앙코르를 방문하고 묘사했듯, 바이욘 탑의 사면불들에 새겨진 관세음보살(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들은 사방을 향해 “거대한 미소(enormous smiles)”를 띤 채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바이욘의 남서쪽 그늘 아래 깊숙이 잠든 꼬마유는, 죽어서도 매일 아침햇살과 붉은 노을 속에서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 자비롭고도 기괴한 돌부처의 영원한 눈길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서는 그가 돌들의 파수꾼이었으나, 죽어서는 수십 개의 거대한 돌부처들이 반대로 그의 영면을 호위하는 형국이다.

사건 직후, 장 꼬마유의 텅 빈 자리를 대신하여 EFEO의 고고학부 책임자로서 앙코르의 복원 작업을 이어받게 된 앙리 파르망티에(Henri Parmentier)는 1916년 극동연구원 회보(BEFEO) 16권에 실은 비통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격찬했다. “비록 지금 그의 동료들과 캄보디아인들이 바이욘 근처에 작은 기념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지만, 그를 위한 더욱 위대하고 진실한 기념비는 그가 앙코르의 밀림 속에서 맨손으로 이룩한 거대한 ‘보존의 결과물(gigantic work)’ 그 자체다. 그가 자신의 남은 생명을 기꺼이 바쳐 구원해 낸 이 오래된 돌들이 저토록 꼿꼿하게 앙코르의 하늘 아래 서 있는 한, 장 꼬마유의 숭고한 기억 역시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 눈물겨운 찬사는 식민지 개척이라는 폭력적인 시대적 한계를 넘어, 파괴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유한한 육체를 무한한 돌의 시간과 기꺼이 맞바꾼 한 고독한 보존소장에게 바치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헌사였다.

부서진 돌들의 수호자, 폐허의 신화로 영원히 남다

장 꼬마유의 치열했던 삶과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바이욘의 남서쪽 모퉁이에 덩굴을 덮어쓴 채 조용히 남겨진 그의 비석은 20세기 초 유럽의 식민지 고고학이 인도차이나에 남긴 단순한 발굴 연대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예술적 열망과 식민지 시대의 척박한 현실, 그리고 인간과 폐허가 맺을 수 있는 가장 극적이고 감상적인 서사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라 플레슈의 반항적인 군사 훈련병에서 캄보디아 밀림을 헤매는 외인부대의 군인으로, 예산 부족에 시달리던 빈곤한 ‘일요 화가’에서 극동연구원의 꼼꼼한 행정가를 거쳐, 마침내 천 년의 잠에 빠져 있던 위대한 크메르 제국의 유산을 무덤에서 파내어 세계에 알린 제1대 앙코르 보존소장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48년 여정은 필연적으로 앙코르의 돌들을 향해 나아가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집필한 『신들의 황혼』의 묘사처럼 크메르 신들의 장엄한 몰락을 눈앞에서 목도하며 , 무너져 내린 수만 개의 사암 블록들을 ‘꼬마유의 돌무더기’로 정성껏 모아 올리며 제국의 시간을 연장시켰다. 말라리아의 독기와 맹렬한 모기 떼의 공격 속에서도 아내마저 잃은 채 고독의 가치를 절대적인 ‘이상’으로 찬양했다. 원주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그들의 지친 마음을 농담으로 어루만지던 그의 뜨거운 인간애는 결국 무지하고 잔혹한 강도의 칼날 앞에 속절없이 스러졌으나 , 앙코르의 돌들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뜨거운 붉은 피를 마지막 양분으로 삼아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결국 장 꼬마유의 뾰족한 피라미디온 묘비가 오늘날까지 바이욘 사원의 남서쪽 대나무 숲길 끝에 고집스럽고도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는 이유는 명백해진다. 그 묘역은 외세 침략자의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평생 동안 이방의 낯선 돌들이 겪는 아픔을 껴안고 무너진 성소를 재건하려 했던 한 예술가적 순교자의 신성한 제단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화가의 여린 감수성으로 앙코르 와트의 쓸쓸한 일몰을 화폭에 담고, 훈련받은 군인의 흔들림 없는 집념으로 거대한 밀림과 싸웠던 이 위대한 몽상가는, 수십 개의 거대한 얼굴들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초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이욘의 그늘 아래에서 마침내 가장 평온하고 완전한 영면에 들었다. 오늘날 앙코르 톰의 웅장한 사원들 사이를 거니는 수백만의 순례자들은 폐허의 돌 틈을 맴도는 서늘한 열대의 바람 소리 속에서, 한때 이 버려진 폐허를 자기 영혼의 유일한 안식처로 삼고 돌들의 수호자가 되기를 자처했던 첫 번째 파수꾼, 장 꼬마유의 치열하고도 열띤 숨결을 짙게 느끼게 된다. 그의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가 숨결을 불어넣은 앙코르의 돌들은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영원히 그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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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와 메콩 지역의 역사, 문화, 경제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Mekong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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